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훈제 청어 (문단 편집) === [[중세]] [[성직자]]와 훈제 청어 === 중세 유럽의 가톨릭 교회는 산해진미 폭식을 종교적 죄로 여겼으므로 종교적인 날에는 일부러 질박한 음식을 먹으라고 법제회하였다. 7세기에 이르자 육식을 금하는 날이 급격히 증가했다. 4세기에 시작된 사순절 단식과 금육이 이때쯤 연중 40일로 늘어났다. 그 외에도 새로 생긴 여러 축일과 전통적인 정기 금육일[* 최소한 2세기, 그리스도교가 박해받는 불법종교였던 시절부터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은 금식하며 기도하는 날이었다.]을 모두 합하면 한 해의 절반에 해당하는 날들이 금육해야 했다. 잉글랜드 법으로 금요일에 육식을 할 경우 [[교수형]]에 처해졌을 정도로 철저히 지켜졌다. 이 법은 영국에서는 16세기 [[헨리 8세]]가 로마 교황청과 단교할 때까지 성문화되었다. 단식/금육일에는 성생활도 금지되었고 식사는 한 끼로 제한되었다. 육류는 '뜨거운' 것이어서 [[섹스|검열삭제]]와 연관되기 때문에 [[오신채|금지되었다]]. 그러나 물에 사는 동물들([[비버]], [[수달]], [[돌고래]], [[고래]]의 몸통에서 꼬리까지 포함)은 차가운 것으로 간주되어 종교적인 날에도 먹을 수 있었다. 이런 까닭에 종교적 금제를 받지 않으면서 값도 싼 훈제 청어와 훈제 [[대구(어류)|대구]] 등은 절대다수 [[서민]]층의 주식이 되었다. 그렇게 싼 가격에 구할 수 있는 [[나트륨]]과 [[단백질]] 공급원이 달리 없었다. 청어는 대구 등과 함께 대서양에서 많이 잡혔으며 독일 한자동맹 어부 및 상인들, 네덜란드 어부와 상인들은 이 청어교역이 큰 수입원이었다. 한 마디로 훈제 생선류는 당시로서는 검소질박한 서민 음식의 대명사였다.[* 훈제는 아니지만 조선시대 문헌에도 청어를 값싸고 맛이 있어 가난한 [[선비]]들이 잘 사먹는 물고기라며 비유어(肥儒魚), 즉 유학자(선비)를 살찌우는 물고기라고 기록했음을 보면 사람 사는 모습은 어디나 비슷비슷한 듯.]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